어느 추운 겨울날 복싱데이(Boxing Day, 12월 26일)에 잉글랜드 리버풀에서의 한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경기장은 5만3천명의 관중으로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차있고, 흥분한 관중들은 최고의 축구스타들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으며, 경기장에 서둘러서 와야 한다는 조언을 무시한 덕분에 경기장에 들어오지 못하고 자신의 게으름을 탓하고 있는 1만 4천명이 경기장 밖에 모여 있습니다.
오늘의 경기를 앤필드(Anfield) 스타디움에서의 리버풀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로 추측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1920년이고 에버튼의 홈구장인 구디슨 파크(Goodison Park)에서 경기가 열리고 있습니다. 프레스톤(Preston)의 딕, 커스 레이디즈(Dick, Kerr’s Ladies)가 잉글랜드 여자축구의 중대한 시점에서 숙적인 랭커셔(Lancashire)의 세인트 헬렌즈 레이디즈(St. Helens Ladies)를 4대 0으로 격파한 것입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입니다.
그들은 누구였는가?
딕, 커 주식회사(Dick, Kerr and Co. Ltd.)는 세계1차대전 발발시 영국의 주요 경철도 장비 생산업체였습니다. 이 회사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W.B. 딕(W.B. Dick)과 존 커(John Kerr)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1917년 스코틀랜드에서 프레스톤으로 이전했습니다. 전쟁 중에는 다른 공장들이 그랬던 것처럼 군수품 생산업체로 전환되었고, 참전한 남자들을 대신해 여성들을 근로자로 고용했습니다.
잉글랜드 북부에서는 공장들이 축구팀을 운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자연히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축구를 하는 여자 축구팀들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여자팀들은 남자팀들과도 경기를 했고 특히 여자팀이 승리한 후에는 경쟁관계가 생겨, 공장에서 공식적으로 여자축구팀을 조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공식 경기를 하다
자선경기에 대한 제안이 있었으며, 이 구상은 계속 확대되었습니다. 1917년 성탄절에 딕, 커스 레이디즈팀은 전설적인 프레스톤 노스 엔드(Preston North End)팀의 홈구장인 딥데일(Deepdale)에서 최초의 공식경기를 가졌고, 1만 명의 관중 앞에서 애룬들 쿠타드 파운드리(Arundel Coulthard Foundry) 여자팀을 4-0으로 대파했다. 이 경기로 2백 파운드가 모금되어 근처 무어 파크(Moor Park)에 있는 상이군인 병원에 기부되었으며, 이 경기에 대한 소식은 전국에 배포되는 신문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경기 요청이 들어왔고 잉글랜드 여자축구의 개척자로서 딕, 커스 레이디즈팀 선수들은 그 요청에 응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들은 지금으로 따지면 1,400만 파운드(약 261억8천만원)에 해당하는 7만 파운드가 넘는 돈을 자선기금으로 모금했습니다. 1918년 봄, 이 팀은 딥데일에서 경기를 세 차례 더 가졌고, 1919년 9월에는 뉴캐슬 유나이티드(Newcastle United)의 홈구장인 세인트 제임스 파크(St James’ Park)에서 3만 5천명의 관중 앞에서 경기를 하였습니다. 이 때가 여자축구팀들이 전국에서 싹을 틔우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세계적인 스타의 탄생
1920년에는 더욱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여자축구연맹에서 한 팀을 파견해 잉글랜드에서 4번의 투어 경기를 갖도록 하였고 이 일을 계기로 공장 근로자로 구성된 딕, 커스 레이디즈팀이 세계적인 축구스타가 된 것입니다.
4월 30일 금요일 이 팀은 딥데일에서 잉글랜드를 상징하는 고유 색상의 유니폼을 입고 2만 5천명의 관중이 보는 앞에서 프랑스팀을 상대로 2대 0으로 승리한 후, 다음 날 스톡포트(Stockport)에서 열린 경기에서 5-2로 승리했습니다. 다음에는 맨체스터 시티의 하이드 로드(Hyde Road) 경기장으로 가서 1대1로 무승부를 기록한 후 마지막으로 런던에서는 첼시의 홈구장이자 FA컵 결승전이 열렸던 스탬포드 브릿지(Stamford Bridge)에서 경기를 가졌습니다.
국영 언론사가 대기하고 있었으며, 프랑스의 파세(Pathé) 뉴스제작회사 카메라도 공장의 여성 근로자들을 수퍼스타로 변신시켰습니다. 패배를 모르던 딕, 커스 레이디즈팀은 예상밖으로 1대 2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은 하룻밤 사이에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구디슨 파크에서 열린 경기에서도 만원사례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올드 트래포드(Old Trafford)에서도 바스 레이디즈(Bath Ladies)와의 경기에서 3만 5천명의 관중을 동원했으며, 앤필드에서는 2만 5천명의 관중 앞에서 레스트 오브 브리튼(Rest of Britain)팀을 9대1로 초토화한 후, 프랑스팀과의 4차례에 걸친 투어경기에서는 무패행진을 기록한 끝에 파리에서 열린 경기에서는 2만 2천명의 관중 앞에서 1대1 무승부를 기록했습니다.
딕, 커스 레이디즈는 잉글랜드를 대표하여 스코틀랜드와 경기를 가졌는데 홈 경기에서 22대0으로 대파하였고, 1년 뒤 셀틱 파크(Celtic Park)에서는 6천명이 모인 가운데 역시 9대0으로 대승을 거둔 후 스코틀랜드를 순회하면서 5 차례의 경기를 더 가졌습니다. 에딘버러, 킬마녹, 애버딘, 던디, 덤프리즈에서 열린 이 경기들에 총 7만 명의 관중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
딕, 커스 레이디즈팀의 치솟는 인기를 우려의 눈으로 지켜 보던 축구협회는 이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습니다. 많은 선수들이 전쟁으로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해 전쟁 중에 시즌이 중단되었던 남자축구팀들은 이제 겨우 제자리를 찾기 시작한 터였습니다.
축구협회는 여자축구 경기로 모금한 기금이 실제로 자선단체에 전달되지 않는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언론 플레이를 시작했고, 전문의료인들로 하여금 여성이 축구를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의견을 내도록 했습니다. 1921년 12월 5일, 축구협회는 축구가 ‘여성에게 매우 부적절’하며, 따라서 모든 회원 축구팀의 경기장에서 여자축구팀들의 경기를 전면 금지하도록 결정했습니다.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많은 다른 나라들이 이 결정을 따랐습니다. 이 금지령은 1971년 7월, 거의 50년이 지나고서야 해제되었습니다. 이제 현재의 여자 축구계 상황은 제5회 FIFA 여자월드컵축구가 지난 9월 30일에 끝난 것을 보더라도 매우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앤디 레이(Andy Wray), 주태국영국문화원 (British Council Thailand), 방콕 포스트(Bangkok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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